<상속의 역사> 백승종 지음 | 사우

[더 리포트=박세리 기자] 효도가 사회윤리 규범이었던 동아시아에는 부양 계약서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과거 유럽인들은 부모자식 간에 부양 계약서를 썼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국가의 복지제도가 효율적으로 작동한 20세기를 예외로 두면, 멀리 중세 때부터 이어져 천 년의 전통을 가졌던 계약서다.

중세 때는 문맹자가 많아 구두계약이 대부분이었지만 18~19세기에 이르러 부양 계약서를 작성하는 지배적 흐름이 있었다. 도시 중산층의 경우 상속자가 피상속자를 어떻게 부양할지 구체적으로 명시했는데, 의식주를 비롯해 병을 얻으면 간병을 어떻게 할지, 장례는 어떻게 치를지 자세히 기록했다.

더 생경한 점은 식생활에 관한 부분이다. 이를테면 우유는 일주일에 몇 리터나 제공할지, 번터와 치즈는 얼마만큼의 분량을 줄지, 고기요리는 한 달에 몇 번이나 식탁에 올릴지 정했다. 규정을 어기고 부양에 게을렀던 상속자는 자격이 박탈되어 유산 상속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들이나 조카를 대신해 노인을 끝까지 시중들었던 하녀나 이웃이 유산을 상속하기도 했다.

농촌의 경우 부양계약서와 비슷하게 은퇴계약서를 썼다. 유럽 도처에서 발견되는 문서로 노쇠한 농부가 자신의 경작지나 소작지를 자식에게 맡기고 생업 전선에서 물러나며 작성했다. 경작지를 소유한 농부뿐만 아니라 소작농민도 문서를 만들었다. 작성 시기와 방법은 나라마다 달랐지만, 농지 규모가 작을수록 은퇴 시기가 빨랐다. 높은 수준의 농업생산성을 생각해 빨리 세대교체를 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은퇴 이후 상황에 따라 따로 살거나 한집에서 살며 농장에서 생산되는 우유와 고기, 감자, 달걀, 땔감 등을 제공받았다. 오늘날의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 문제를 상속의 역사로 조망하는<상속의 역사>(사우.2018)가 소개한 내용이다.

효도라는 사회적 강제 장치가 느슨해지는 현대에 재산 상속을 둘러싼 분쟁은 심심찮게 벌어지는 일이다. 사실 우리나라에도 부양 계약서와 비슷한 경우가 있다. 이른바 ‘효도계약서’다. 재산 상속 후 부양을 이행하지 않을 시 재산반환 소송을 할 수 있는 단서 조항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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