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봐야 한다. 김대건 신부가 보낸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참혹한 형벌 모습이 글씨 사이에 그려져 있다.
자세히 봐야 한다. 김대건 신부가 보낸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참혹한 형벌 모습이 글씨 사이에 그려져 있다.

[더 리포트] 올해 4월 7일은 기해박해 180주년이다. 기해박해란 1839년(헌종 5)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박해사건이다. 흔히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한국교회사연구소는 지난 달 21일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서울 가톨릭평화방송 10층 성당에서 공개대학을 열고 있다.

이 중 4일 3강에선 연구소 소속 이민석 연구원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가 공대되었다. 김대건 신부(당시 부제-사제 바로 아래 성직자)의 ‘기해박해’ 보고서이다. 

보고서는 1845년 1월 조선에 입국한 김대건 부제가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보고한 장문의 서한이다. ‘기해일기’ 편찬자에게 기해박해 전체 상황을 직접 듣고 확인한 후 1845년 4월 6일과 7일 두 번에 걸쳐 그 경과를 담은 것이다.

보고서의 작성할 당시 상황은 이랬다. 김대건 신부는 1842년 10월 마카오에서 요동지방 백가점에 도착해 국내 박해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1845년 1월 중순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요동에서 전해 듣기만 했던 기해박해의 진상을 파악하고 그 내용이 상세히 적어 스승을 통해 파리외방전교회에 보고했다.

내용은 조선 순교사에 관해 △조선 교회 설립에 관한 개요 △1839년 기해박해의 진상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는 1801년 신유박해가 노론 벽파 사람들이 남인에 대한 반기로 일어난 것이며 이후 1845년까지 800명이 넘는 순교자가 탄생했다고 기록한다.

김 신부는 “‘배반자 유다스’ 김여상이라는 거짓 신자가 기해박해 중 신자들에게 최대의 재난을 초래했다”라며 “그의 밀고로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가 순교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역사학자들은 이 보고서가 ‘기해일기‘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보고서에서 김대건 신부는 조선의 박해 상황과 형벌을 잘 모르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이해를 돕고자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세 선교사의 모습과 신자들에게 가해진 대표적인 6가지 형벌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소개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30명의 교우들이 최소한의 인도적 배려를 받지 못하고 극악 죄인으로 취급 받아 조선의 최고 극형인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고 전했다. 이어 참혹한 고문 실태도 증언했다. 내용은 참혹했다.

18살 이 아가타는 300대 태형과 90대 치도곤을 맞아 순교했고, 14살 유대철은 600대 이상의 태형과 40대의 치도곤을 맞았으며, 다른 순교자들도 매를 맞아 뼈가 부러지고 골수가 튀어나오기가 일쑤였다는 내용이다.

김대건 신부는 보고서 마지막 부분에 “이번에는 여기까지 적는다”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후일 순교자들의 행적을 계속 정리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1845년 사제품을 받고 재입국한 후, 다음 해인 1846년 병오박해로 순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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