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전용 미술 학원 <이름이 없는 화실>(서울 송파구) 내부.

[더 리포트] 미술학원 한 곳을 추천 받아 찾아가 봤다.

송파에 있는 이 화실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학생들 입시 그림이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그림 수업을 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다른 하나는 이름이다. 상호가 ‘이름이 없는 화실‘ 이다. 특이한 이름을 지은 이유에 대해 김민경 원장은 ’이름‘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재미있는 생각이다. 예전에 읽은 미술관 기획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름을 대면 알 수 있는 유명 큐레이터가 기획을 했는데, 이름이 '그림이 없는 그림 전시회'였다. 어떤가. 호기심이 일지 않는가.

기자가 방문한 지난 25일 오후. 수강생 넷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젊은 여성 둘과 그보다 나이 많은 남성과 여성이었다. 한창 그림그리기에 몰입하고 있는 남자 수강생을 만나봤다.

이제성(55)씨는 퇴직자다. 모 증권회사에서 임원을 지냈다. 법인을 상대로 증권사 상품을 파는 일이었다. 펀드나 ELS 같은 상품이다.

이제성씨가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그림 경력’은 5년이다. 그 중 2년은 회사 다닐 때다. 퇴직 후 남은 삶에서 매진할 수 있는 일(혹은 취미)를 갖기 위해 미리 준비했다.

“30년 간 같은 일을 했습니다. 퇴직하고 나면 했던 그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요.”

그는 2년간 1주 한 번 씩 화실을 다녔다. 생초보였다.

회사를 나온 후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지금은 일주일에 4차례 총 12시간을 그림에 쏟는다.

인생 2막의 준비기간 동안 스킨스쿠버, 수영, 자전거, 골프 해봤다. 그 중 최종선택이 그림이었다. 왜 그림인지 물었다.

“세 가지입니다. 고등학교 때 미술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또 평소에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 해졌습니다. 그래서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을 땐 반드시 유명 미술관에 들렀지요. 마지막은 처칠의 어록입니다. 그가 했던 말이 늘 마음에 남아있었지요.”

그 말이란 이렇다.

“다시 태어나면 만년동안 그림만 그리고 싶다.”

"그림 그릴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그림 그릴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제성씨는 퇴직 후 세속적인 목표, '남을 위한 성취'에 시간을 쓰지 않기로 했다. 내가 행복해지는 일, 그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사실 뭐 좀 잘한다고 해봤자 역사에 남지 않습니다. 웬만큼 뛰어나서는 기억되지 않습니다. 미국 대통령 이름을 몇 명이나 압니까. 모두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거의 기억 못하지 않습니까.”

화실에서 처음 붓을 댄 장르는 소묘였다. 지금은 주로 유화를 하고 있다. 수채화는 어렵다. 유화는 덧칠을 통해 고쳐갈 수 있으나 수채화는 그리고 나면 수정이 안 되기 때문이란다.

그림 이야기를 더 했다. 제성씨는 곰브리치가 <서양미술사>에서 말한, 이집트 미술의 특징을 좋아한다.

이집트 미술가는 모든 사물들을 가장 특징적인 각도에서 보이도록 그렸다. 머리는 옆에서 보여질 때 가장 잘 보인다. 따라서 옆 모습을 그렸다. 어깨와 가슴은 정면에서 볼 때 가장 그 모습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그들이 그린 그림 속 인물의 상반신은 앞을 쳐다 본다. 특히 다리와 발이 그렇다. 엄지발가락부터 위쪽으로 연결되는 발의 분명한 윤곽선을 그리는 것이 가장 발을 잘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왼발과 오른발이 똑같이 안쪽이 보이도록 그렸다. 유명한 이야기다.

이제성씨 작품 중 하나.
이제성씨 작품 중 하나.

그러고 보면 그림을 그리는 일은 아는 것, 보이는 것을 확장시키는 행위다. 제성씨 역시 자신만의 '앎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노력 중이다.  단순히 사진이나 풍경을 모사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창작으로의 이행 중이다. 그 방식은 이렇다.

“특정 그림에서 좋아 보이는 색이나 구도, 형태를 떠올립니다. 그것을 내 그림에 부분적으로 배치시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림의 하늘 색이 참 좋았다면 그 하늘 색을 내 그림에 넣고, 나무 색이 좋았다면 내 그림의 나무를 그 색으로 그리는 식이지요.”

그는 그림 그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화장실 가는 일을 잊고 그릴 때도 많다.

꿈이 하나 있다면 ‘국전’ 입선이다. 나라에서 주최하는 국전은 이미 없어졌다. 미술협회에서 주최하는 전국대회에서 수상이다. 그림 그리는 일 자체도 행복하지만, 어느 정도 실력이 늘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다.

왼쪽부터 E. H. 곰브리치, H.W. 젠슨, 캐롤 스트릭랜드의 ‘서양미술사’.

미술공부는 단지 실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는 미술사 책을 많이 읽었다. 그중 세 권의 책을 추천했다.

E.H.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H.W. 젠슨의 <서양미술사> 그리고 캐롤 스트릭랜드의 <클릭 서양미술사>였다. 이 중 제일 마지막 책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이후 자연스럽게 화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름없는 화실> 김민경 원장에 대해 물었다.

“잘 가르칩니다."

이 한마디로 정리했다. 이해 쉽게 가르치는 아이디어가 많다는 것이다. 그 배경은 나이답지 않은 경력에 있다. 김 원장은 미대를 다닐 때부터 학원에서 파트타임 일을 했다. 실력이 좋아서 혹사당할 정도로 했다. 그 노하우가 지금의 학원을 건실하게 운영하도록 만들었다.

기자가 그림을 취미로 하고 싶다며 소질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 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름이 없는 화실> 김민경 원장이 수강생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소질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하면 웬만큼 그릴 수 있습니다. 일단 해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림을 그려보면 재능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기 전에는 모르지요.”

김 원장에게 좋아하는 화가를 물었다.

영국 화가 ‘피터 도이그’를 꼽았다. 도이그의 풍경 작품에 대해 많은 관람객은 특유의 묘한 색에 반한다. 자료를 찾아 보니 ‘강렬하면서 환각적인 색조’라는 한 줄로 작품세계가 정리되어 있다. 하나 더 더하면 ‘친근하면서도 동시에 낯설어 보이는, 시간을 초월한’ 작품이란 평이다.

그 영향인지 김 원장의 그림 특징은 ‘환상적인 색’이라고 한다. 수강생들의 말이다. 피터 도이그 작품을 찾아보니, 미술평론가의 평 그대로였다. 아름다웠다.

그런데 기자의 눈에는 이제성씨 작품도 매우 훌륭했다. 아마 도이그도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Peter Doig, The Architect’s Home In The Ravine, 1991년 작
Peter Doig, The Architect’s Home In The Ravine, 1991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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