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309호 백자 달항아리.
국보 제309호 백자 달항아리.

[더 리포트] 달 항아리는 조선시대 17세기 초부터 18세기까지 제작된 순백색의 도자기다. 달과 닮았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달항아리의 특징은 ‘상하 접합’ 기술이다. 이 기술을 자세히 들여다본 논문이 있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문화유산융합대학원 석사논문인 <백자 달항아리 제작기법 연구>(강태춘, 2019)는 백자 달항아리의 제작기법의 실제와 달항아리가 갖는 특징적인 제작기법인 ‘상하접합’ 기법을 속성적·기술적·사회적 측면에서 분석했다.

논문은 “백자 달항아리는 비교적 그 시기가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정보의 양이나 정확성이 부족한 편”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항아리는 도예가는 물론이고, 수많은 분야에서 재해석되어 새로이 변모하고 있으며 대중에게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고 연구 배경을 설명했다.

논문에 따르면 오늘날의 ‘백자 달항아리’는 높이 40㎝ 내외의 보름달처럼 희고 둥근 17~18세기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로서 몸체 중앙부에서 최대경을 이루고 몸체최대경과 높이가 약 1:1의 비례를 이루는 기형을 말한다.

백자의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로 추정된다. 당시 백자는 생활품 혹은 식민지의 약탈품으로 여겨지는 것이 전부였다. 이는 아사카와 형제, 야나기 무네요시 등의 일본인 학자와 이에 영향을 받은 조선인 문화예술인들의 관심과 논의를 통해 예술품으로서 그 중요성이 주목되었다.

특히 대표적인 백자 수집가이자 애호가였던 화가 김환기와 도상봉은 달항아리를 작품의 주된 소재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60, 70년대까지 이어져 최순우, 정양모 등의 미술사가 내에서도 식민지적 관점을 탈피한 해석과 ‘이조백자달항아리전’ 등 조선 백자를 중심으로 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논문은 백자 달항아리를 지칭하는 명칭은 시대별로, 분야별로 혼재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1950년대 당시 김환기, 최순우 등 근대기 미술계 인사에 의해 붙였다고 알려졌다는 것이다. 이후 2005년 문화재청의 ‘백자대호 일괄 문화재 지정’과 국립고궁박물관의 첫 기획전인 ‘백자 달항아리전’을 계기로 달항아리의 가치와 그 명칭이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2011년 문화재청의 ‘국가지정 동산문화재 지정명칭 변경 공고’를 통해 국보 및 보물의 문화재명 또한 백자대호에서 백자 달항아리로 변경되었다. 현전하는 달항아리는 지정문화재 7점(국보 제262호·309호·310호, 보물 제1437·1438·1439·1441호), 비지정문화재 17점이다.

논문은 달항아리의 제작 과정을 조선시대 문헌사료를 통해 살펴보았다. 태토의 선정과 굴취는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는 중요한 단계였으며 금사리 시기의 성분을 보면 철과 티타늄의 함량이 낮아 높은 백색도를 보이는 양질의 태토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정제과정, 즉 수비 단계를 거쳐 발물레를 사용한 자기물레로 성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 달항아리의 제작에는 상부와 하부를 따로 만들어 접합하는 방식을 사용한 점이 주목된다. 별도의 장식 없이 최소한의 정형을 거쳐 초벌과정을 거친다.

또한 시유는 크게 물토(수을토), 재,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유약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금사리 시기의 유약은 마그네슘 함량이 높아 점착성과 내화성이 높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약 1250℃에서 환원염 재벌과정을 통해 완성한다.

논문은 “작가마다 작업습관 및 방식이 다르다는 차이가 있지만 핵심은 상하접합 기법에 있다”고 밝힌다. 이를 토대로 달항아리의 특징적인 제작 기법인 ‘상하접합’ 방식을 사용한 이유를 속성적, 기술적, 사회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논문은 “당시 수비법의 진전으로 인한 태토의 개선 및 가소성 저하 등 백자 속성의 한계점의 극복, 무접합 제작 시 조형상의 차이점 및 숙련도와 소요시간 등 기술적 문제의 해결, 전통기법으로 인한 미감이 갖는 예술품으로서의 가치 확보 등을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자세한 내용은 논문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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