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포트] 시이불견(視而不見)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눈은 밝은 빛 아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외부세계를 볼 수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언뜻 보면 안 보이는 대상이 있다. 기타카와 우타미로의 ‘찻집 2층에서’(춘화첩 <우타마쿠라>중, 1788, 대영박물관, 런던​)이 그렇다.

기타카와 우타미로의 ‘찻집 2층에서’

여성의 뒷모습, 그리고 남성의 얼굴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이를 잘 설명한 글이 있다.

난간의 평행된 배경 구도와 배치된 인물의 기묘한 자게가 가져다주는 강안 에로타시즘과 천박하다기 보다 차라리 우아한 자세의 구도적 안정감과 물결치는 흘러내리는 의상의 기묘한 구도적 재치 등이 현대 회화 양식의 새로운 등장을 요구하던 당시의 작가들을 열광시킨 새로운 회화적 충격이었다. (블로거 ‘송풍수월’)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실낱 같은’ 남자의 오른쪽 눈이다. 이 눈은 서양 인상파, 입체파, 후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가 하면 아는 만큼만 보이는 대상은 훨씬 더 많다.

아래는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그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이다. 관람객은 이 그림에서 무엇을 보는가. 아니 무엇을 봐야 하는가. 답은 손가락이다. 중지와 약지를 모으고 있다.

엘 그레코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티치아노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손가락 모습은 엘 그레코가 자신의 스승이었던 티치아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 일종의 오마쥬다. 스승 그림의 상징을 따라한 것이다.

엘 그레코는 “나의 창조성의 기원은 티치아노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상징하는 오브제다”라고 말한다.

다음은 우리 선조가 만든 반가사유상이다. 이 동상에서는 주목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

현재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7세기)이다. 일단 눈이 가는 쪽은 미소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가 일본의 국보 제1호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을 보고 한 찬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시간의 속박을 초월해서 이뤄낸 인간 존재의 가장 맑고, 원만하며 영원한 모습의 표상이다.’

또 하나는 오른쪽 손이다. 반가사유상을 만든 장인은 손가락을 얼굴에 대든가 떼든가, 하나를 구부리든가 두 개를 구부리든가 하며 변화를 줬다. 이 중 손바닥을 정면으로 노출한 모습은 거의 보기 힘들다.

그러나 가장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발가락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소장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오른발 엄지를 치켜들고 있다. 대부분 반가사유상은 발가락은 아래쪽을 향한 채 얌전하다. 그에 비해 이 조각상은 관람객 보란 듯이 중력을 거스르며 도발하고 있다. 왜 이 발가락을 주목해야 하는지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안내문에 있다.

'곱게 땋은 머리단이 가운데서 갈라져 양어깨 위로 늘어져내린 것은 드라마틱한 직선 무늬를 보는 듯하다. 이에 반해 손가락과 발가락은 아주 나긋나긋하고 생기가 넘치게 표현되었다. 특히 오른쪽 엄지발가락의 생생한 표현은 마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살아 숨을 쥐는 듯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발바닥은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족적足跡을 남기다’란 말에서 보듯 예수나 부처의 말씀과 생각, 지혜는 족적으로 남겨진다. 육신이 다 사라진 뒤에 유일하게 남는 신체는 머리나 심장이 아니라 발바닥인 셈이다. 발바닥은 신체의 축소이기도 한데 엄지발가락은 얼굴에 해당한다.

혹시 이 작품을 만든 장인은 우리가 사물을 볼 때 하찮은 것이라도 자세히 봐야한다고, 핵심은 그런 곳에도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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