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위치한 낙화암.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됐다. (신정일 기자)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위치한 낙화암.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됐다. (신정일 기자)

사람들은 가끔씩 옛 추억을 찾아가듯 부여에 간다. 부소산 낙화암에 올라 요절한 가수 배호가 불렀던 ‘추억의 백마강’을 불러 제낀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서 울어나 보자.

사람들은 그 노래 한마디를 부르며 잃어버린 백제 왕국을 되찾는 착각에 빠져 이 나라의 노래방에선 밤마다 슬픔도 없이 구곡 간장이 알알이 찢어져 갔다.

조선 숙종 때 사람 석벽 홍춘경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라가 망하니 산하도 옛 모습을 잃었고나

홀로 강에 멈추듯 비치는 저 달은 몇 번이나 차고 또 이즈러졌을꼬

낙화암 언덕엔 꽃이 피어 있거니

비바람도 그 해에 불어 다하지 못했구나.

그 부여에서 내세우는 부여 팔경은 슬프기 그지없다. 양양 낙산사,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 강릉 경포대 같은 관동 팔경이나 도담삼봉, 사인암 같은 단양 팔경에서 내세우는 아름다운 광경이나 경치와는 이름부터가 틀리다.

미륵보살상과 탑 하나 덜렁 남은 정림사지에서 바라보는 백제탑의 저녁노을과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백마강가의 아지랑이, 저녁 고란사에서 들리는 은은한 풍경소리, 노을 진 부소산에 간간이 뿌리는 가랑비, 낙화암에서 애처러이 우는 소쩍새, 백마강에 고요히 잠긴 달,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 규암나루에 들어오는 외로운 돛단배.

부여 팔경은 부소산과 낙화암 그리고 그 아래를 흐르는 백마강을 중심으로 이뤄진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경치다.

금강 속으로 여승들은 사라지고···

거기에 신동엽 시인이 썼던 〈금강 잡기〉에 이르면 백마강과 부여 땅에 스민 슬픔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초여름 백마강가 고란사에 세 젊은 여승이 찾아왔다. 회색 승려 복을 단정히 입은 그들은 이틀을 묵으며 고란사를 찾는 사람들과 그 근처 상인들과 잘 어울렸다. 때로는 보트도 타고 조약돌을 주어 바랑주머니에 넣으며 이틀을 지낸 후 그들은 조약돌이 가득 담긴 그 무거운 바랑주머니를 어깨에 걸어서 허리에 꼬옥 졸라매고 일렬로 늘어서서 강의 중심을 향해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을 본 사람이 있었다. 건너 마을 사공이 날씨를 보러 문 밖에 나왔다가 어스름 아침에 강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세 그림자를 보고 말았다. 그것을 보고 놀라서 마을 청년들에게 소리 질렀다.

그러자 그와 때를 같이 하여 주먹만 한 소나기 빗발이 온 천지를 덮으면서 난 데 없는 뇌성벽력이 하늘과 땅을 뒤덮어 놓았다. 소나기와 천둥이 가라앉은 후 마을 사람들과 절간의 승려들이 모든 배를 동원하여 그들을 찾았는데 가장 어린 여승의 시체가 물위에 떠올랐다고 한다. 스물 둘 스물넷이라던 두 여승은 끝내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 유서도 없이 유언도 없이 그들은 떠오르지 않기 위해 발견되지 않기 위해 무거운 자갈바랑을 몸에 묶고 물속으로 죽음의 길로 걸어간 것이다“

그들은 이승 저편 피안의 세계에 무엇을 보았을까. 그들의 죽음에 하늘은 어찌하여 소나기와 뇌성벽력을 조화했을까. 신동엽 시인은 그날 오후 백마강 가에 나가 죽어서 누워 있는 그 젊은 여승을 보았단다. 너무도 앳 띤 얼굴, 이 세상 그 어느 것에도 상관이 없다는 듯 평화스런 얼굴을 바라보고 강기슭을 한없이 거닐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경관과 나라 잃은 슬픔이 곁들여져 이곳을 찾는 나그네들의 심사를 어지럽히는 백마강 건너 솟아오른 산이 부소산(扶蘇山)이다.

부소산에는 임금과 신하들이 서산에 지는 달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겼다는 송월대가 있고 동쪽 산정에는 임금이 매일 올라가서 동편 멀리 계룡산 연천봉에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맞으며 국태민안을 빌었다는 영일루가 있지만 현재의 홍산현 관아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고 군창터가 남아 지금도 불에 탄 곡식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낙화암은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고사로 유명하지만 <삼국유사>에는 ‘타사암’, 즉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로 기록되어 있으니 사실과 전설의 차이는 이렇게 다르다. 고란사에 뒤편의 약수는 백제왕들의 어용수로 유명하다.

임금이 고란사의 약수를 마실 적에 한 잎을 띄어서 마셨다는 고란초는 조선 세종 때에 편찬된 <향약약성대전>에 수록돼 있다. 신라의 고승 원효가 백마강 하류에서 강물을 마셔보고 그 물맛으로 상류에 고란초가 있음을 알았다는 신비의 여러해살이 풀이다. 고란초는 한방에서 화류병의 즉효약으로 쓰였다고 하는데 고사리과에 속한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송리 낙화암에 있는 백화정. 신라·당나라의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할 때 이곳 부소산 큰 바위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궁인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라고 한다. (신정일 기자)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송리 낙화암에 있는 백화정. 신라·당나라의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할 때 이곳 부소산 큰 바위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궁인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라고 한다. (신정일 기자)

고란사 아래 백마강을 ‘대왕포’라고 부르는데 <삼국사기> 무왕 37년 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3월에 왕은 좌우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비하(백마강) 북포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 그 사이에 기이한 꽃과 이상한 풀을 심었는데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왕은 술을 마시고 흥이 극도에 이르러 북을 치고 거문고를 뜯으며 스스로 노래를 부르고 신하들을 번갈아 춤을 추니 이때 사람들은 그곳을 대왕포라고 말하였다.”

수심은 얕아졌지만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흐르고 있으나 백마강에는 슬픈 역사가 서려있다. 소정방이 백제성을 공격할 때 비바람이 몰아치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건널 수가 없었다. 소정방이 이 근방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물으니 “백제의 의자왕은 밤에는 용으로 변하고 낮에는 사람으로 변하는데 왕이 전쟁중이라서 변하지 않고 있어서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난 소정방이 그가 타고 다니던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하여 그 용을 낚아 올리자 금세 날이 개였고 드디어 당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 공격하여 성을 함락하였다. 그때 용이 낚았던 바위를 조룡대라고 하고 강의 이름이 사비하였던 것을 백마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고 춘원 이광수는 백마강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사자수 내린 물에 석양이 빗길제 / 버들꽃 날리는데 낙화암 이란다 /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 맘 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우리들은 흘러가는 백마강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패망의 역사이고 다시 올 리 없는 역사지만, 험난했던 그 세월 그 역사 속으로 천천히 거슬러 올라갔다.

고려 때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그 때 백제의 왕도 부여에서 떠돌아 다녔던 말을 이렇게 적고 있다.

“19년 봄 2월에 여우 떼가 궁중에 들어왔는데 흰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앉았다. 여름 4월에 태장궁에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 장수를 보내어 신라의 독산, 동잠 두 성을 침공하였다. 5월에 서울 서남쪽 사비하에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발이었다. 가을 8월에 웬 여자 시체가 생초진에 떠내려왔는데 길이가 18척이었다. 9월에 대궐 뜰에 있는 홰나무가 사람의 곡성과 같이 울었으며 밤에는 대궐 남쪽 행길에 귀곡성이 있었다.

20년 봄에 서울의 우물물이 ‘피’빛으로 되었다. 서해가에 조그마한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다 먹을 수 없이 많았다. 사비하의 물이 피 빛과 같이 붉었다. 여름 4월에 왕머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성안에 사람들이 까닭도 없이 누가 잡으려 하는 듯이 달아나다가 쓰러져 죽은 자가 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것은 계산할 수도 없었다. 5월에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서 천와, 도양 두절의 탑에 벼락을 쳤으며 또 백석사 강당에 벼락을 치고 동쪽, 서쪽에는 용과 같은 검은 구름이 공중에서 서로 부디 쳤다. 서울에 있는 뭇개가 노상에 모여서 혹은 짖고 혹은 곡을 하더니 얼마 후에 곧 흩어졌다. 웬 귀신이 대궐 안에 들어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 한다”고 크게 외치다가 곧 땅 속으로 들어가니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들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더니 석 자 가량 되는 깊이에서 거북 한 마리가 발견되었는데 그 등에 “백제는 달과 같이 둥글고 신라는 달과 같이 새롭다”는 주문자가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달과 같이 둥글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며 달과 같이 새롭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며 달과 같이 새롭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된다.”고 하자 왕이 성을 내어 그를 죽여 버렸다. 어떤 자가 말하기를 “달과 같이 둥글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달과 같이 새롭다는 것은 미약한 것이니 생각하건대 우리나라는 왕성하여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하여 간다는 것인가? 합니다”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

부여 낙화암과 구드래 나루 선착장. (신정일 기자)
부여 낙화암과 구드래 나루 선착장. (신정일 기자)

역사는 항상 이긴 자의 편에서 기록되어 왔다. 낙화암에서 떨어진 삼천궁녀의 이야기나 방탕한 임금 의자왕의 이야기가 몇백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서경천도를 주장했던 묘청을 몰아낸 김부식에 의해서 쓰여 졌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바라볼 때 그 무렵 백제 국력으로 3000명의 궁녀는커녕 300명의 궁녀도 당치 않았을 것이다. 그것마저도 옛 백제의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안쓰러운 항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당시 13만 호에 이르렀다는 부여가 지금은 3만도 안 되는 인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역사는 떠도는 말보다 기록에 의존한다. 쓰여진 그 기록들이 모두 다 정답만은 아닐 것이다. 잘못 쓰여 진 역사, 그래서 잘못 알려진 역사가 바로 잡혀질 그 날을 우리들은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날은 어느 천년에 올 것인가? 끝없이 회의하면서 바라본 고란사에서는 현장 학습하러 온 아이들의 웃음소리만 요란했다.

고란사에서 구드래 나루까지 이어지는 뱃길을 오고가는 유람선들은 시간을 기다리고 우리들은 백사장에 앉아 멀리 규암나루와 부소산을 바라다 본다.

그래, 가고 오는 것이 세월이고, 그 세월 속에 사람들만 자꾸 바꾸는 것이 세상 풍경이지, 이골 저골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소란스럽기 이를 데 없는 저 부소산은 백제 123년의 영광과 상처를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만 지키고 있을 뿐이지.

백사장에 남긴 새들의 발자국 위에 우리들의 발자국을 얹어두고 강을 따라 가다가 뒤돌아보니 구드래 나루에는 유람선 몇 대만 매어 있을 뿐으니.

아, 역사는 오고 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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