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포트] [知탐]은 지식을 탐하다를 줄인 말입니다.-편집자 주

‘간결한 문체와 상징적 수법으로 헤밍웨이를 비롯한 현대 미국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미국시인 스티븐 크레인(Stephen Crane, 1871년~1900년)에 대한 소개 글이다. 국내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그의 문학세계를 ‘비정한 사실주의 문체와 자연주의적 세계관’으로 표현된다. 그는 서른도 채 안 되어 결핵에 걸려 죽었으나 방대한 분량의 시와 소설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인의 대표적인 시 중 하나는 ‘사막에서’이다.

In the Desert

In the desert /I saw a creature, naked, bestial, / Who, squatting upon the ground, / Held his heart in his hands, / And ate of it. / I said, “Is it good, friend?” / “It is bitter—bitter,” he answered; / “But I like it / “Because it is bitter,

/ “And because it is my heart.”

스티븐 크레인.
스티븐 크레인.

사막에서

짐승처럼 발가벗은 생물을 만났는데 / 땅 위에 웅크리고 앉아 / 손에 자기 심장을 들고는 / 그것을 먹고 있었다. / “맛이 있나. 친구?” 물었더니 / “쓰지. 몹시 쓰지.”라고 대답했다. / “하지만 쓰기 때문에 좋아하지. / 그리고 내 심장이기 때문에.“ /

참 기묘한 광경이다. 책은 거대한 풀과 나무가 우거진 정글과 같아서 가끔 안내를 받아야 한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 해설이 필요하다. 차근차근 풀어보자. 이 시에서 사막은 무엇일까.

정관사 ‘the’ 가 붙어 있음으로 일반적인 사막은 아니다. 특정한 사막이거나 시인이 알고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막이다. 따라서 황폐한 세상이나 황폐한 마음에 대한 상징일 수 있다. 짐승은 무엇일까. 짐승을 닮은 벌거벗은 생물은 아마도 본래의 인간, 원초적인 인간일 듯싶다.

심장은 하트heart를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는 마음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생물은 심장을 먹으면서 몹시 쓰다고, 또한 쓰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또 자신 심장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쓰다’는 삶의 고통을 나타낸 말일 것이다. 그런데 쓰기 때문에 좋아한단다. 이를 통해 쓰디쓴 상황을 받아들이는 달관과 인내를 느낄 수 있다. 어떤 이는 매운 고추가 고통을 주기 때문에 더 좋아한다. 인생은 본디 쓰디쓰다. 더구나 그는 말한다. ‘자신의 심장’이기 때문이라고. 남의 심장이 아닌 내 심장.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다.

결국 이 시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을 노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저 견디는 수밖에.

혹은 우리 사회의 은유일 수도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의 삶은 황폐하다. 벌거벗은 사막의 짐승보다 낫다고 볼 수 없다. 시 속의 짐승은 자기 심장을 먹음으로써 생명을 이어간다. 고통을 전가하는 대신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우리 사회 역시 참 된 사람들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다.

A Man Said to the Universe

By Stephen Crane / A man said to the universe: / “Sir, I exist!” / “However,” replied the universe, / “The fact has not created in me / A sense of obligation.”

한 사내가 우주에 대고 말했다. / “이 보시오.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소!” / “그렇긴 한데”, 우주가 대구했다, / “그 사실이 내게 의무감을 / 만들게끔 하지는 않는데“

정말 쿨 하지 않는가. 말 그대로 ‘간결하고 냉소적인 사실주의’ 문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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