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가서 보면 잊혀지지가 않아서 다시 가고 싶은 빼어난 누정 주암정 일대. (사진=신정일)

[더리포트] 오천년 역사가 켜켜이 쌓아올린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적. 대대로 전승된 장인의 솜씨와 금수강산이 빚어낸 우리의 소중한 국가자산을 찾아보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참 신기한 것이 많다. 사람도 그렇지만, 사물들도 여러 형상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오비디우스도 <변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는지도 모른다.“사람의 마음은 항상 신기한 것을 향해서 움직인다.” 

사람의 마음을 금세 빼앗는 곳, 문경시 산북면에 있는 주암정도 그러한 곳 중의 한 곳이다. 
안동댐에서 흘러내린 낙동강의 큰 흐름이 태백산 자락에서 발원한 내성천과 충청북도 죽월산에서 시작하는 금천이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서 만난다. 

세 줄기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라서 '한 배 타고 세 물을 건넌다.'는 말이 있는 삼강리는 경상남도에서 낙동강을 타고 오른 길손이 북행하는 길에 상주 쪽으로 건너던 큰 길목이었다. 또 삼강리는 낙동강 하류에서 거두어들인 온갖 공물과 화물이 배에 실려올라와 바리짐으로 바뀌고 다시 노새의 등이나 수레에 실려 문경새재를 넘어갔던 물길의 종착역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낙동강 줄기를 따라 더 올라가면 안동 지방과 강원도 내륙으로 연결되는데, 삼강리에서 금천을 거슬러 올라간 곳에 주암정이 있다.

문경시 산북면을 흐르는 금천변에 경체정, 주암정, 우이정 등 고즈넉하면서도 아름다운 정자들이 늘어서 있어 석문구곡이라고 알려져 왔는데, 그중에 가장 빼어난 정자가 주암정으로 한번 가서 보면 잊혀지지가 않아서 다시 가고 싶은 빼어난 누정이다.

그렇다면 옛 사람들은 어떤 곳에 누정을 지었을까? 누정(樓亭)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명칭으로서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루 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식의 집이다.

이규보가 지은 <사륜정기(四輪亭記)>에는 “사방이 확 트이고 텅 비어 있으며 높다랗게 만든 것이 정자”라는 설명이 나온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누정 조’에 의하면 누정은 루(樓), 정(亭), 당(堂), 대(臺), 각(閣), 헌(軒), 재(齋) 등을 통칭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누(樓)는 2층으로 되어 연회를 베푸는 곳이다. 

이규보의 글에 가장 합당한 곳에 지어진 정자가 주암정인데, 그 이름처럼 마치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 위에다 날렵한 정자 하나를 세운 뒤에 주암정(舟巖亭)이는 이름을 지었다. ‘배에 실린 정자, 정자를 싣고 가는 배.’라는 뜻을 지닌 주암정에 오르면 마치 천국에서 배를 타고 연꽃이 핀 아름다운 바다를 유람하는 것 같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경상북도 문경시(聞慶市) 산북면(山北面) 서중리(書中里) 44-4번지에 있는 주암정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종(顯宗) 때의 생원인 주암 채익하(舟巖 蔡翊夏1633-1676)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1944년에 세웠다. 인천채씨(仁川蔡氏)인 그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나재 채수(懶齋 蔡壽)의 6세손으로 벼슬은 하지 않고 생원시에 합격했던 이다.

마을의 동남쪽을 흐르는 금천 변에 배의 형상을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주암(舟巖)이라 하였다. 금천 변에 제방을 쌓기 전에는 강물이 이곳으로 흘렀다고 한다. 

주암정은 어느 때 가느냐에 따라 다른 풍경을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정자 주변에서 피고지는 꽃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봄이면 봄마다 피어나는 목련꽃을 비롯한 봄꽃들이 지고 여름이 오면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 내내 피고 또 지는 연꽃이 저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정자가 주암정이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이름난 정자에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판과 기문들이 많이 걸려 있는데, 주암정에는 채익하의 9대손인 채홍탁이 지은 주암정기(舟巖亭記) <주암정기> 에 실린 이 정자를 지은 내력을 보자. 

'배에 실린 정자, 정자를 싣고 가는 배.’라는 뜻을 지닌 주암정. (사진=신정일)

"웅연의 남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모양이 흡사 배가 언덕에 정박하여 길게 매여 있는 것 같았다. 옛날에 나의 선조 상사 부군(채익하 1633~1675) 일찍이 시내를 거슬러 오르며 노날고 즐기면서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붙였다. 이로 인해 주암으로 자신의 호를 삼았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이 바위를 찿아와 유람하는 사람은 모두,사람은 가고 없고 이름만 남은 데 대한 감회를 가지게 되었다.

옛날 집안일로 모임을 열었는데 사손인 蔡宗鎭(1907~1958)씨가 슬픈 기색을 띠고 나에게 "대개 사람은 선조가 지나 다니던 곳이라도 그 유적을 보호하기 위하여 혹 글씨를 새기고 집을 지어 그 뜻을 기념하고자 하는 일이 허다하다.

하물며 이 주암은 선대에서 뜻을 기탁한 곳으로 마을 곁에 가까이 있어서 날마다 접하지 않는 날이 없다. 그러하니 어찌 정자 하나를 경영하여 국을 봐도 조상이 보이는 사모의 정을, 진氏의 思亭처럼 의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시험삼아 저 바위의 형상을 살펴 보면 비록 사납게 출렁이는 물걸위에 떠 있는 듯하나 중후하여 옮겨지지 않으며, 설령 배를 유지로  옮길 힘이 있더라도 움직일 수 없다.

혹 배에 물이 새는 시대가 될지라도 영원히 가라앉을 염려가 없다. 그렇다면 하늘이 이 바위 배를 은밀하게 숨겨 두었다가 일찍이 우리 상사 선조를 기다려 오늘에 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이곳에 오르고 이곳에 노니는 사람들은, 한갓 서까래가 그다지 화려하지 않음과 원림이 광할하지 않음에 마음을 두지 말고, 다만 물결을 따라 아래위로 흔들리지 않고 또 세상과 더불어 부침하지 않으며 우뚝이 마치 큰 강 중류의 지주석과 같음을 보라. 돌이켜 이 몸이 세상을 건너감도 또한 이 정자가 주암에 실린 것과 같음을 생각하고 가벼이 움직이지 않는 까닭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물이 모두 제 자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이러하기를 바라노라 망령되고 경솔함을 헤아리지 않고 간략히 전말을 서술하여 기문으로 삼는다.“

주암정에 들어서면 주인이 없어도 '차 한 잔 드시고 가세요.'라는 글이 있고 마루에는 봉지커피와 커피믹스가 놓여 있다. 주인의 따스한 마음을 느끼며 마시는 차 한 잔을 음미히며 바라보는 기둥위에 주련의 글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주암은 금천 가에 만고 토록 떠있고,
절벽의 서나무는 넘어질 듯 매달렸네.
선조께서 달에 취한 자리에
어진 후손이 사모하여 작은 정자 지었네.
버들 언덕에 깃든 꽃은 봄기운에 어여쁘고
안개 노을은 의연히 깎은 벼랑 안고 있네.”

주암정 주변 풍경이 기문을 쓸 당시와는 많이 달라졌어도,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포근하게도 하고, 옛 추억들을 물밀 듯 밀려오게도 하는 주암정에서 능소화 피고 지는 소리를 들으며 한 시절을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암정에서 보이는 건너 편에 그림 같은 정자인 경체정이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는 경체정은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할 정도로 멋들어진 풍경이다. 어쩌면 문경의 금천변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일지도 모른다. 

경체정의 대문에 들어서면 유유히 흐르는 금천을 끼고 너럭바위 위에 오롯이 자리한 경체정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경체정은 1935년에 채묵진과 아들 채홍의가 할아버지인 채성우를 비롯해서 영우, 약우, 현우, 장헌, 용우, 장오 등 7형제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경체정은 1935년 채묵진과 아들 채홍의가 할아버지 채성우를 비롯한 일곱 형제를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하며 정자 이름은 <시경> ‘소아편’에 있는 상체지화(‘常棣之華)에서 따왔는데, 풀어서 말하면 ‘형제가 많아서 집안이 번성한다는 뜻에서 취했다고 하며 체(棣)자는 산앵두나무 체인데 산앵두나무의 무성한 꽃은 수많은 형제를 상징한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앞쪽은 바닥의 바위를 그대로 살리면서 기둥을 설치하여 경체정을 지었는데, 이와 같이 빼어난 정자를 지은 뒤 그 풍경에 대한 소감을 시로 남겼다   

오랜 세월의 경영을 신속히 이룸은
명가의 자손이 각각 정성을 쏟음이라
 건축하여 선조의 염원을 쫓을 뿐만 아니라
 장수하여 후생을 면하게 하고자 하노라
정오에는 처마 열어 들판 빛을 보고
 바람따라 베개 옮겨 강물 소리 듣는다
저녁에는 동봉에 솟은 달을 그리고
길게 누대 향해 밤마다 걸어간다

금천가에 아름다운 절경으로 남아 있는 경체정은 원래 문경시 산양면 현리마을 안에 있었던 것을 1971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정자는경체정은 벽정壁亭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이유는 경체정이 위치한 곳의 바위를 부벽이라고 하며 영조 때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권상일이 금천의 물길따라 청대구곡을 설정하고서 9곡 중에 제2곡을 부벽을 안고 도는 물굽이를 이른다고 해서 벽정으로 이름지었다.​

청대구곡중 제4곡이 이 근처의 형제암이라고 하는데, 형제암은 경체정 바로 앞 부벽 아래 물속에 두 개의 바위로 된 것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물 속에 잠겨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경체정이 자리잡은 금천은 산양천 또는 금강이라고 불렸으며, 1980년대까지만 하여도 백사장이 넓어 이곳에서 씨름 등 다양한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사라져서 볼 수가 없고 경체정 앞쪽의 작은 소나무만이 그때의 풍경을 바람결에 들려주고 있다. 

위엄을 갖추었으면서도 주변의 자연에 거슬리지 않고 정갈하고 간결한 주암정과 경체정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다가 그곳을 두고 떠나올 때 문득 당나라의 문장가인 유우석劉禹錫이 슬프게 생애를 마감한 유종원을 조상하며 쓴 글 한 편이 문득 가슴을 치며 지나갔다.

 옛 보던 그 숲 보고 내가 탄 말 울음 울 제  我馬暎林嘶
그대가 탔던 그 배 산굽이로 사라지네.  君帆轉山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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