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 (출처=병산서원 홈페이지)
서원건축의 백미 병산서원. (출처=병산서원 홈페이지)

[더리포트=이진수기자] 조국 사태부터 검수완박까지. 최근 몇년새 정치적 신념에 따라 갈등이 격화되는 일이 빈번해졌다. 특정 이슈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한 분쟁은 오랜 세월 지속되기도 하는데 그 좋은 예는 '병호시비(屛虎是非)'다. 

병호시비란 퇴계 이황의 좌측에 김성일과 류성룡 중 누구의 위패를 둘 것이냐의 논쟁이었다. 다시 말해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 중 누가 더 퇴계의 제자로서 서열이 높으냐의 대립이었다. 왼쪽이 이른바 '상석'이다.

1620년 퇴계 이황의 여강 서원(호계 서원)을 건립하면서 시작됐다. '병'은 풍산 류씨의 병산서원이고 '호'는 의성 김씨의 호계서원이다.

이 분쟁으로 김성일과 류성룡의 후학들이 서로 절교했으며 수백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렇다면 두 문중의 자녀들은 어땠을까.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처지가 아니었을까. 

<조선후기 향전(鄕戰)을 통해 본 양반층의 친족(親族), 혼인(婚姻) -안동의 병호시비(屛虎是非)를 중심으로>(한상우,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대동문화연구')에서 그에 대한 답이다. 결론적으론 '그렇지 않았다'이다.

논문은 향전(鄕戰)에서 각 양반 문중(친족조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탐색했다. 소재는 향전의 대표적인 사례인 병호시비다.

향전이란 조선 후기 향권(鄕權-향촌사회 권력)의 장악을 목적으로 한 세력 다툼을 말한다.

연구에 따르면 문중은 정치적으로 통일되지 않거나, 상황에 따라 분파되기도 하는 유동적인 성격을 가진 조직이었다. 논문은 더 자세하게 들어가, 병호시비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의 혼인관계를 분석했다.

그 결과 이 논쟁이 일어나기 전 한 두 세대 이전의 혼인관계는 이후 병호시비에서의 정치적 입장과 뚜렷한 관련성을 보이지 않았으나, 상대적으로 이후의 혼인대상 선정에는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병호시비가 전개되는 과정과 그 이후에도 병-호 양측의 혼인관계가 유지됐다. 논문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러한 현상은 혼인의 정치적 의미를 더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실제로 당대 유력 양반 가족들의 혼인 네트워크를 분석한 결과, 혼인에는 정치적 입장 뿐 아니라 다른 요소(벼슬이나 학문)들 역시 크게 작용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병호시비는 2009년 안동시에서 호계서원을 복원하면서 좌측에 류성룡을, 우측에 김성일의 위패를 배치하기로 하면서 끝났다. 이어 2013년 퇴계 좌측에 서애, 우측에 학봉 위패를 모시는 것으로 지역 유림이 합의했다. 무려 393년만의 매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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