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마암 일대. (사진=신정일)
여주 마암 일대. (사진=신정일)

[더리포트] 오천년 역사가 켜켜이 쌓아올린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적. 대대로 전승된 장인의 솜씨와 금수강산이 빚어낸 우리의 소중한 국가자산을 찾아보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태백에서부터 발원한 남한강이 흘러내리며 만든 여러 물굽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의 한 군데가 신륵사 부근일 것이다. 한강의 상류인 이곳을 이 지역 사람들은 여강이라 부르는데 주변의 풍경과 그 수려함이 하도 뛰어나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명승 중의 명승인 이 여강 일대를 두고 조선 초기의 학자였던 김수온은 그가 지은 <신륵사기>에서 “여주는 국도의 상류지역에 있다.”라고 썼었다.

김수온이 말했던 국도는 바로 충청도 충주에서부터 서울에 이르는 한강의 뱃길을 말함이었다. 신작로나 철길이 뚫리기 전까지는 경상도의 새재를 넘어온 물산이나 강원도, 충청도에서 생산된 물산들이 한강의 뱃길을 타고 서울에 닿았으므로 한강의 뱃길을 ‘나라의 길’로 부른 것은 올바른 것이었다. 정선 아우라지에서 띄운 뗏목이 물이 많은 장마철이면 서울까지 사흘이면 도착했다는데 1974년에 팔당댐이 생기고 충주댐이 만들어지면서 ‘나라의 길’이라고 일컬어지던 뱃길은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목은 이색은 그의 시에서 ‘들이 펀펀하고 산이멀다.’라고 이 곳 여주를 읊었었고 조선 세조 때 사람인 설무우는 “긴 강은 서쪽으로 흘러가고 겹겹으로 된 구름은 북으로 와서 얕은  산을 둘렀네.”라고 하였으며 조선 초기의 학자 서거정은 “강의 좌우로 펼쳐진 숲과 기름진 논밭이 멀리 몇 백리에 가득하여 벼가 잘되고 기장과 수수가 잘되고 나무하고 풀 베는 데에 적당하고 사냥하고 물고기 잡는데 적당하며 모든 것이 다 넉넉하다.”라고 하였던 것처럼 여주의 산은 야트막하고 들은 넓어서 쌀의 대명사 하면 여주, 이천 쌀이 되었을 것이다. 목계, 가흥을 지난 남한강이 점동면 삼합리에서 섬강과 청미천 즉 세 물줄기를 합하여 이 곳 신륵사 부근으로 흐른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웅장하거나 급하지 않고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다.”라고 쓰고서 그 까닭을 “강의 상류에 마암과 신륵사의 바위가 있어서 그 흐름을 약하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는데 그 마암과 신륵사 앞을 흐르는 여강에 목은 이색에 얽힌 일화가 있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 들어섰고 그 와중에 두 차례의 유배를 겪은 이색은 설상가상으로 사랑하던 아내마저 잃고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그는 방랑의 길을 떠났다. 68세가 되던 5월 그는 그의 고향인 여강(지금의 여주)으로 갔다. 그때 그의 문생門生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그 제자를 붙들고 지나간 서럽던 날들을 얘기하며 하루 종일 통곡했다고 한다. 그때 산을 내려오며 지은 시는 이러했다.

소리를 안 내려니 가슴이 답답하고 / 소리를 내려 하니 남의 귀 무섭구나. / 이래도 아니 되고 저래도 아니 되니 / 에라, 산속 깊이 들어가 종일토록 울어나 볼까?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인 이상은李商隱은 “3년 동안 고향 그리워도 눈물을 참았는데, 봄바람 다시 부니 참을 수 없을듯하네,” 라는 시를 남겼는데 이색의 심정이 그러했으리라. 그해 가을 그는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토록 한 많았던 세상과 속된 인간사를 잊고자 입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색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가 그를 부른 것이다. <태조실록>에는 그때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상감께서 부르시니,  이때에 색이 왔다. 상감께서는 옛 친구의 예로써 대하고, 조용히 더불어 이야기하며 술상에 마주앉아 서로 즐겁게 마시고 떠날 때는 중문까지 나가서 배웅해주셨다.”

그러나 신흠申欽의 <명창연담明窓軟譚>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태조가 색을 부르니, 색이 와서 서로 만났는데 색은 읍揖만 하고 절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조는 어탑御榻에서 내려와 손님의 예로 대하였다. 조금 있다가 시강관侍講官들이 들어와 줄을 지어 앉으니, 태조는 어탑에 올랐다. 이때 색은 뻣뻣이 일어나면서 ‘늙은 사람 앉을자리는 없구나’ 하고 나갔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모르는 일이나, 이 일이 있은 다음 해 이색은 이곳 여강에서 이성계가 보냈다는 술 한 잔을 마시고 그 배 위에서 그만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이색의 제자들은 고려의 신하였으면서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을 주도했던 정도전과 조준이 꾸민 계획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색의 의문사는 세월 속에 잠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도 남한강은 유유히 흐르고 마암 건너편에 신륵사가 있다.

여주 신륵사. (사진=신정일)
여주 신륵사. (사진=신정일)

 

신륵사 강월헌과 벽탑. (사진=신정일)
신륵사 강월헌과 벽탑. (사진=신정일)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 기슭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 진평왕 때에 원화스님이 창건했다고 하지만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절 신륵사가 유명해진 것은 고려 말의 고승 나옹선사가 이 절에서 열반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양주 회암사에서 설법하던 나옹선사는 왕명에 의하여 병이 깊었는데도 불구하고 밀양의 형원사로 내려가던 중 이 곳에서 입적하게 되었다. 그 때의 일을 이색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 이날 진시에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고을 사람들이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었다. 화장을 하고 유골을 씻고 있는데 구름도 없는 날씨에 사방 수백 보 안에 비가 내렸다. 이에 사리 1백 55 과를 얻었다. 신령스런 광채가 8일 동안이나 나더니 없어졌다...”

퇴락해 가던 신륵사를 대대적으로 중창불사하게 된 것은 그러한 연유 때문이었고 신륵사의 절 이름에 얽힌 유래 두 가지는 이렇다.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서 용마가 자주 나타났는데 매우 거칠고 사나워 누구도 다룰 수가 없었다. 그 때 이 절의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다는 설이 하나이고 또 다른 전설로는 미륵 혹은 나옹선사가 이 사나운 용마에게 굴레를 씌워 용마를 길들였다는 전설이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이라고 불렸는데 이 절 동쪽의 바위 위에 탑 전체를 벽돌로 쌓아올린 다층전탑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옹선사가 입적한 3개월 후 절의 북쪽 언덕에 진골사리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 편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이 절 또한 사세가 크게 위축되었다가 크게 중창된 시기가 광주의 대모산에 있던 세종대왕을 모신 영릉이 인근에 있는 능서면 왕대리로 이전해 오면서부터였다.

세종의 깊었던 불심을 헤아려 왕실에서는 신륵사를 원찰로 삼았고 절 이름도 잠시 보은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되었다. 임진, 정유재란 때 전소되면서 그 때에 지어진 건축물로는 드물게 대들보가 없는 조사당만 남아있다. 그 뒤 현종 12년에 계헌이 중건하면서 오늘날 신륵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강월헌에서 바라보면 날렵하게 솟아있는 신륵사 다층전탑(보물236호)은 완성된 형태로 남아있는 국내 유일의 전탑이다. 탑이 대개 경내 중심부에 있는 것과는 달리 이 전탑은 금당의 본존불과는 무관하게 남한강과 그 건너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탑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신라 말기 무렵이었고 도선국사가 활동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풍수지리상 허한 곳을 보(補)하고 지기를 원활하게 하는 방법으로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전탑 위쪽에 대장각기비가 있다. 신륵사에 있던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사창을 기록한 것으로서 목은 이색 집안의 애달픈 사연이 어려있다. 목은의 부친 이곡이 그 부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장경을 만들기로 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달리하자 목은 이색이 그 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대장각기비문은 이숭인이 짓고 권주가 해서체로 썼다.

절 마당에 들어서면 구룡루가 있다. 나옹선사가 아홉 마리의 용에게 항복을 받고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전설의 누각인 구룡루를 돌아가면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이 있다.

높이가 3m의 다층석탑(보물 제285호)은 특이하게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상층기단의 면석에는 신라나 고려의 석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룡문과 연화문, 그리고 물결 무늬와 구름무늬의 조각들이 빼어난 조각 솜씨를 자랑하듯 새겨져있다. 이 석탑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성종 3년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여주 신륵사 승탑. (사진=신정일)
여주 신륵사 승탑. (사진=신정일)
영월루.. (사진=신정일)
영월루. (사진=신정일)

대웅보전 좌측으로 돌아가면 나옹스님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향나무 앞에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호)이 서 있다. 대들보가 없는 팔각지붕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자그마하면서도 예쁜 건물이다. 정면에는 여섯짝의 띠살 창호를 달고 양측면과 후면은 모두 벽체로 마감하였다. 이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지만 조선태조가 그의 스승 무학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이 남아있다.

조사당 뒤편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나옹선사 석종부도와 부도비, 그리고 석등을 만나게 된다. 언덕 일대가 나라 안에 유명한 명당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 나옹선사를 추모했던 수많은 제자들이 지극한 공력으로 만든 부도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팔각원당 형에서 벗어나 새롭게 변모된 고려시대 양식으로 조성된 나옹선사 부도는 고려 우왕 3년에 만들었다 종을 닮았다고 해서 석종부도라고 불리는 이 부도는 통도사의 금강 계단처럼 높은 기단을 만들고서 그 위에 세웠으며 금산사의 석종보다 더 간소화한 형태로 만들어졌고 그 옆에는 석종비가 서있다.

우왕 5년(1397)에 건립된 이 비는 이색이 짓고 글씨는 한수가 썼다. 석종부도 앞에는 아름다운 석등 한기가 있다. 부도의 주인에게 등불공양을 올리는 공양구이며 부도를 장엄하게 하기 위해 조성된 이 비는 보물 제231호이며 키는 194Cm이다.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이 석등에 유달리 화사석만 납석을 써서 은은한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화사석 팔면의 각 면마다 돌출된 원기둥에 살아있는 듯 한 용을 조각하였고 화두창 넓은 간지에는 비천상을 새겼다. 전체적인 면에서 자그마하지만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고려 말의 귀중한 문화유산인 이 석등에 불이 꺼진 지 이미 오래다.

여강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영월루에서 남한강 물줄기를 바라보는데, 문득 <금강경金剛經> ‘사순계四句戒’의 한 구절이 들려오는 듯 했다.

“모든 것이 꿈과 같고 환상과도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도 같으며 이슬과도 같고 번개 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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