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보이는 차귀도. (사진=신정일)
멀리보이는 차귀도. (사진=신정일)

[더리포트] 오천년 역사가 켜켜이 쌓아올린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적. 대대로 전승된 장인의 솜씨와 금수강산이 빚어낸 우리의 소중한 국가자산을 찾아보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제주 올레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어디일까? 제주 올레를 개척했던 서동성씨는 10코스라고 부르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은 수월봉에서 차귀도를 바라보며 걷는 12코스다. 어딜 보아도 절경이라서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이라는 춘향가의 한 구절 같아서 경탄에 경탄을 연발하며 걷는 길이 제주 올레 12코스다. 

수월봉水月峰에서 드넓게 펼쳐진 제주 벌판은 어머니의 치마폭을 예쁘게 모자이크 한 것처럼 아름답다.

녹구물오름, 녹고물오름. 또는 무니리오름이라고도 부르는 수월봉은 한 장동마을 북쪽에 있는 산이다. 정상에는 수월정이 있으며, 예로부터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던 산이다.

수월정 뒤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앞에는 깎아 세운 듯한 벼랑이다. 밑에는 망망한 바다가 광활하게 열려 있어 가끔씩 수평선을 넘나드는 크고 작은 배들이 나타날 때는 그 정경에 찬탄을 금하지 못하게 된다.

차귀도와 제주 바다. (사진=신정일)
차귀도와 제주 바다. (사진=신정일)

고산포구로 가는 엉알길은 가히 환상적이다. 찰싹 거리는 길 너머 몸을 드러낸 차귀도는 자귀섬, 자구섬, 또는 죽도라고 부르는 섬이다. 자귀나무가 많아서 자귀섬이라 하였고, 차귀도로 이름이 지어졌는데, 이 차귀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고려 제 16대 임금인 예종 때의 일이다. 송나라 복주福州 출신의 술사 호종단胡宗旦이 황제의 명을 받고 고려에 거짓 귀화를 하였다. 그는 예종의 신임을 받은 뒤 마음 놓고 고려 각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지맥과 수맥을 모두 끊고 다녔다.

그때 이곳 제주도에서도 혈맥을 끊었는데, 그 이유는 제주도에서 중국에 대항할 큰 인물이 태어날 형국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호종단이 혈맥과 지맥을 모두 끊고서 배를 타고서 송나라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폭풍이 일어 배가 비얌섬 사이로 침몰되었다. 그 사실을 접한 조정에서는 한라산의 수호신이 지맥을 끊고 돌아가는 호종단을 막았다고 여겼다.

그때부터 그 신을 ‘광양왕‘이로 봉하여 해마다 향과 제물을 내리어 제사를 지냈으며, 이 섬을 호종단이 돌아가지 못한 섬이라 하여 차귀도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 편 이 섬은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대섬‘이라고도 부른다.

차귀도 남쪽에는 장군석이라는 오백장군바위가 있는데, 그 전설이 슬프기 그지없다. 옛날에 설문대 할망이 오백 명의 아들을 데리고 한라산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워낙 식구가 많다가 보니 그날그날 동냥을 얻어 와야만 끼니를 마련할 수가 있었다. 하루는 아들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할미는 아들들이 먹을 죽을 큰 가마솥에 끓이며 죽젓개로 휘휘 젓다가 그만 잘못하여 죽에 빠져 함께 끓여지게 되었다.

아들 오백 형제는 동냥한 양식을 짊어지고 늦게야 집에 돌아왔다. 그들은 배가 고픈 김에 허기부터 채우려고 어머니를 찾을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죽을 먹었다. 그날따라 죽 맛이 좋다 생각하면서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제 일 늦게 온 막내아들이 어머니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다 가마솥을 들여다보며 죽젓개로 젖자, 어머니가 그 안에 빠져서 죽어 있는게 보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막내아들은 크게 서러워하다 무심하게 빠져 죽은 죽을 먹은 형들을 원망하며 도망쳤다. 그리고는 고산 차귀도 앞에 가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다가 그만 바위가 되고 말았으며, 499형제는 그 자리(지금의 영실)에서 그대로 굳어져 바위가 되었다. 전설속의 섬이자  살아 있는 섬으로 자연의 보고인 차귀도는 천연기념물 제 422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차귀도의 안쪽에 자리잡은 섬인 와도는 지형이 누운 사람처럼 생겼다고 해서 ‘눈섬’이라고 부른다.

길을 걷다가 보면 앞서 가기도 하고 뒤에서 가기도 한다. 그때마다 서로 아름다운 풍경이 되어 그리움이 안개처럼 물씬물씬 피어오를 때가 있다. 차귀도를 바라보며 용수포구로 가는 길이 바로 그런 길이다.

용수포구 가는 길 . (사진=신정일)
제주 용수포구 인근. (사진=신정일)
제주 용수포구 인근. (사진=신정일)

천천히 걸어서 도착한 고산포구의 바람은 드세다. 좌판에선 오징어를 구워 팔고, 몇 척의 배들이 정박해 있다. 오래 머물 수는 없고, 포구를 벗어나 길을 따라가니, 높이 148m의 당산봉이 자태를 드러낸다. 한경면 고산리와 용수리 사이에 있는 이 산은 조선시대 차귀악 봉수가 있어서 동남쪽으로 모슬악, 북쪽으로 판포악 봉수에 응하였다. 이 당산봉에 성황사城隍祠가 있는데. 차귀당, 또는 차귀사라고 부르는 당집이 있다.

숲이 우거진 길을 걷는 가 싶더니 바로 능선에 이른다. 정상에는 군부대가 있어서 가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택한다. 얼마쯤 내려갔을까? 다시 당산봉 줄기를 향해 오르자 함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억새가 우거진 능성에서 차귀도가 손에 잡힐 듯 지척이고, 바람은 불고 파도는 철썩 거린다. 제주의 여러 풍경 중 이곳만큼 강렬하게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곳도 그리 흔하지 않으리라.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파우스트가 찬탄하고 싶다던 그 장소가 여기가 아닐까 싶은 그 광경에 나는 얼이 빠져서 망연히 앉아 있을 뿐이다.

그래도 이곳에 머물 수는 없고, 아름다운 여인과 헤어지는 것과 같아서 한 걸음 걸어가고 뒤돌아보고 또 한 걸음 걸어가며 뒤돌아보며 걸어가던 길이 멀리 용수리가 보이는 길이다.

나보다 앞서간 사람들이 아련한 그림 속 풍경처럼 보이는 길이다. 어디쯤 있는가 싶으면 나타나고. 다시 보이는가 싶으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길, 이 길을 두고 이 지역 사람들은 새가 많다고 해서 ‘생이 기정바당길’이라고 부른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 아름다운 길을 걸어서 용수리에 닿는다. 제주군 구우면(한림읍)지역으로 용못이 있어서 용수리라고 하였고, 바닷가가 되므로 세포, 지사개. 지사포, 외포라고 하였다.

용수앞 길가에 있는 못은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큰 못이다. 용수 서쪽에 있는 마을인 주전동은 주근동, 또는 주근디머들이라고 부르는데, 머들(돌담블)이 있어서 쥐들이 잘 숨었다고 한다,. 주근동 서쪽에 곶이 상코지곶이고, 상코지 남쪽에 있는 개가 가묵개다.

이곳 한경면 용수리 해안에는 절부암節婦岩이라난 바위가 있다. 고씨 부인의 정절을 기리는 바위로 높이가 약 70미터에 이른다. 바위벼랑 위에 사철, 후박, 돈나무등 난대식물이 군락을 형성하고 있으며, 앞바다에 대나무가 많이 나는 차귀도가 있다.

조선시대 고산리에 강사철姜士喆이라는 어부가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동안 슬피 울던 아내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절부암에 있는 한 나무에 목매달아 죽고 말았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내가 자살한 그 나무 아래 바닷물에 남편의 시체가 떠올랐다. 마을 사람들은 중국 조아曺娥의 ‘고사’와 같다고 하여 모두 하늘이 낸 열녀라 칭찬하였다. 

14년 뒤 이 사실을 알게 된 판관 신재우는 고씨 부인이 죽은 바위에 ‘절부암’ 이라고 새겨 기리도록 하였으며, 해마다 음력 3월 보름이면 열녀 제를 지내게 하였다. 

지금은 마을 부녀회에서 300여 평의 밭을 마련하여 거기서 나는 소출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바위는 제주도 기념물 제 9호로 지정되어 있다. 11코스와 12코스가 끝나는 용수리에서 날이 저문다. 

바다는 더할 나위 없이 잔잔하고, 제주도는 평화로운 숙면을 취할 것인데, 길이 집이고 집도 길이라 여기며 사는 나그네는 어디에서 긴긴 밤을 자내며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인지... .

제주 수월봉의 등대. (사진=신정일)
제주 수월봉의 등대. (사진=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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