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연구자들이 주도한 국제 공동연구팀이 금 원자들이 모여 나노 결정을 생성하는 순간을 세계 최초로 관찰하는 데 성공했다. 사진 '사이언스' 제공. © Paul Straathof/Paul's Lab
국내 연구자들이 주도한 국제 공동연구팀이 금 원자들이 모여 나노 결정을 생성하는 순간을 세계 최초로 관찰하는 데 성공했다. 사진 '사이언스' 제공. © Paul Straathof/Paul's Lab

[더리포트=이진수 기자]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입자연구단과 한양대 공동연구팀이 10년 연구 끝에 세계 최초로 ‘결정핵 생성’ 순간을 관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 과정은 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있는 알렉산더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과 루이 파스퇴르가 닭 콜레라균을 찾는 중에 얻은 백신 발견과 같은 우연의 결과였다. '결정핵 생성’ 순간 관찰 성공에 얽힌 이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12일 기초과학연구원에 따르면 우리가 보는 대다수 고체물질은 원자가 규칙적으로 모여 이뤄진 결정으로 구성돼 있다. 눈핵(빙정)에 과냉각된 수증기가 모여 눈꽃송이를 만들듯이 물질이 형성되는 데는 원자들이 모여 ‘핵’을 생성하는 과정(nucleation)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 핵 생성 과정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원자가 잘 정렬된 결정 구조가 핵을 형성해 그 구조를 유지하며 커질 것이라는 고전적인 이론과, 비결정 구조에서 결정 구조로 변하면서 물질을 형성한다는 비고전적 이론만 제시됐을 뿐 실제로 핵 생성 과정을 관찰해낸 연구는 없었다.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기계공학과 이원철 교수는 2012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주립대 연구원 시절, 같은 대학에서 박사 과정중이던 박정원 기초과학연구원 나노입자연구단 연구위원(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실험실에 들렀다가 그래핀 위에 이상한 무늬가 생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이 무늬를 분석한 논문을 2015년 <네이처 나노테크놀로지>에 ‘Graphene-templated directional growth of an inorganic nanowire’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상한 무늬는 금 원자를 방출하는 나노물질(AuCN 나노리본)이었는데, 전자현미경으로 사진을 깨끗하게 찍기 어려웠다. 사진을 찍으려 전자빔을 비추면 나노리본이 분해돼 금 나노결정으로 돌아가버렸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도전과 불굴의 응전으로 이룬 성과

하지만 두 사람은 비록 원하는 사진을 얻지는 못해도 금 나노결정이 자라는 모습이 찍힌다는 데 주목했다. 나노리본을 찍는 대신 오히려 금 나노결정 형성 과정을 촬영하기로 연구 방향을 바꿨다. 몇 번 촬영을 해본 결과 “잘하면 더 중요한 과학적 지식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좀더 성능 좋은 촬영기를 구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당시 세계 최고 성능의 전자현미경은 미국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NBNL)가 보유한 TEAM1이었다.

로렌스버클리연구소의 전자현미경 전문가 피터 에르시어스가 공동연구자로 연구팀에 합류하자 연구는 금방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촬영은 2년여 동안 수없이 반복됐다. 나노리본 시편이나 현미경 등 실험 조건을 최적화시켜도 나노 결정이 보였다, 안 보였다를 되풀이했다. 촬영 조건을 수없이 바꿔가며 동영상 질을 높이려 했지만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이원철 교수와 연구팀의 전성호 연구원은 “결정이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이 나타났다 구조가 무너진 비결정으로 돌아갔다 하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됐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기존 결정핵 이론과 상반된 것이었다. 연구팀의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건 촬영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행히 다른 연구자들도 이 교수와 전 연구원의 연구 방향 선회를 받아들였고, 김우연 카이스트 화학과 교수와 미국 전자현미경 촬영 전문가 브라이언 리드 등 외부 전문가들까지 합류해 연구의 속도와 질을 높였다.

하지만 논문 심사 과정에 또다른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특이한 현상을 관찰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자빔과 같은 특이한 원인에 의해 일어난 것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타당한 지적이지만 ‘전자빔 없이 촬영이 불가능한 전자현미경 촬영 결과를 전자빔 없이 얻으라’는 말이나 다르지 않았다. 연구팀은 또다시 마음을 다잡고 전자현미경과 씨름을 해야 했다. 전자빔의 강도를 조금씩 낮춰가며 촬영을 해나갔다. 급기야 1만분의 1까지 줄였다. 다행히 같은 양상의 현상이 일어났다.

‘핵 생성’ 신·구 이론을 뛰어넘는 새 이론 제시

연구팀은 정량적으로 분석한 자료를 제출해 관찰한 현상이 일반적으로도 중요한 결정핵 생성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2019년 10월15일 제출된 논문은 심사에만 1년을 훌쩍 넘겨 지난해 12월28일 최종 게재 승인이 떨어졌다.

연구팀은 새로운 관찰 결과를 설명하는 열열학적 이론을 제시했다. 고전적 핵 생성 이론과 비고전적 핵 생성 이론을 뛰어넘는 새로운 이론이다. 입자가 작을 때는 결정상과 비결정상의 자유에너지 차이가 크지 않아 두 상태를 오고가다, 입자가 커지면 결정상의 자유에너지가 비결정상의 자유에너지보다 충분히 낮아져 안정된 결정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금 원자들이 모여 나노 결정을 생성하는 순간을 1천분의 1초 수준의 초고속으로, 원자를 식별할 수 있는 정도의 초고해상도 영상으로 촬영해 자신들의 이론을 증명했다. 금 원자들은 ‘무질서하게 뭉친 덩어리 구조’와 ‘원자가 정렬된 결정 구조’ 두 상태를 가역적으로 반복하며 결정핵을 형성해갔다.

박정원 교수는 “결정핵 생성의 새로운 원리를 발견하고 검증해 고체물질이 형성되는 과정의 근본 원리를 알아냈다”고 말했다. 이원철 교수는 “박막 증착 공정의 극 초기 상태를 실험적으로 재현했다는 의미가 있다”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관련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데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 연구는 기초과학연구원 연구단사업, 한국연구재단 두뇌한국21(BK21)사업 등 정부 지원과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 등 민간 지원을 받아 진행됐다.

 이 논문은 유명 과학저널 <사이언스> 1월28일치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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