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수 사범은 지금도 신진서 다음 후계자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2020년 2월 12일 LG배 세계기왕전 우승 직후 제자 신진서와의 인터뷰)
정경수 사범은 지금도 신진서 다음의 후계자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2020년 2월 12일 LG배 세계기왕전 우승 직후 제자 신진서와의 인터뷰)

[더리포트=최종훈 기자] 손흥민이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아버지 손웅정 감독의 살신성인이 있었다. 대중은 메이저 리그에서 밝게 빛나는 스타에 열광하지만, 그들이 스타가 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숨겨진 공로자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바둑계에서도 손웅정 감독과 같은 드러나지 않은 영웅이 있다. 3명의 걸출한 바둑 천재를 키워낸 ‘바둑에 미친 사나이’ 정경수 사범이 그 주인공이다. 최근 정 사범은 박지은, 홍맑은샘, 신진서 3명의 바둑 천재를 길러낸 일대기 <바둑 천재들의 베이스캠프>(봄이아트북스. 2021)를 출간했다.

학창 시절부터 바둑에 푹 빠져 일평생 손에서 돌을 놓지 않았으나 프로로 대성하지는 못한 정경수 사범. 그러나 운명과도 같이 하늘은 그에게 3명의 천재를 보냈다. 맨 처음으로 가르친 박지은 양은 여류 바둑기사 1위의 ‘바둑 여왕’으로 성장했다. 그 다음으로 맡은 홍맑은샘은 아마추어 바둑 랭킹 1위를 달성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24명 이상의 프로기사를 배출한 최고의 바둑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일생 최고의 걸작은 세계랭킹 1위 ‘신공지능’ 신진서이다. 신진서와의 만남으로 정 사범은 이세돌을 능가하는 최강의 기사를 배출하겠다는 평생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바둑 역사에 이름을 남길 고수를 하나도 아닌 셋이나 탄생시킬 수 있었을까? 먼저 정경수 사범은 바둑에 푹 빠지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 불우한 유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기 싫어서 바둑에 몰두했습니다. 마침 제가 다녔던 충암고등학교가 바둑 사관학교로 유명했습니다. 바둑을 두거나 구경하는 그 순간만큼은 힘든 현실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흑과 백이 있을 뿐으로, 현실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죠. 바둑을 잘 두고 싶어서 부실에 있는 모든 바둑책을 읽으며 기보를 섭렵했습니다. 고수들의 포석, 행마를 흉내 내며 기본기를 닦았습니다. 1년이 지나자 교내 바둑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인생 처음으로 노력이 빛을 본 순간이었죠. 이때부터 바둑에 더욱 빠져들어 몰입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는 바둑에도 재능이 있다. 하지만 프로 바둑기사가 아닌 바둑 지도자가 되었다. 거기엔 집안 문제가 있었다. 집을 나와 먹고 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계속해서 일해야만 했다.

"퇴근 후와 주말 시간에도 끊임없이 바둑을 연구했으나 결국 저 자신은 등용문을 넘지 못한 이무기에 그쳤습니다. 그렇기에 한국 바둑계를 짊어질 용을 길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천에 작은 바둑 교실을 인수해 정경수 바둑교실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둑교실도 사업이다. 대부분 사업가는 그걸 성공시키는 일에 집중한다. 그러나 정 사범은 공사판에서 막노동까지 하며 제자를 가르쳤다. 왜 그랬을까. 

“저의 운명과 재능은 바둑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아시다시피 바둑은 생태계 최정점에 서지 않는 이상 먹고살기가 매우 고단한 분야입니다. 바둑 교실의 규모를 키워 원생을 많이 확보하면 돈 걱정은 없었겠지만, 저는 항상 소수정예로 제자 한 명 한 명을 집중지도 했습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용’이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가르쳤고, 고맙게도 아이들이 순수하고 재능도 넘쳐 잘 따라왔습니다.”

정 사범은 바둑 천재를 만드는 자신만의 특별한 노하우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에서 제자의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 결핍을 채워주는데 있었다고 밝혔다.

“가장 먼저 제자가 그동안 둔 모든 기보를 구해서 분석합니다. 그러면 제자마다 가진 고유한 스타일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은이는 승부근성이 강해 전투바둑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홍맑은샘의 장기는 계산력이었습니다. 진서는 틀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이 가장 큰 특징이었습니다. 이 스타일은 그대로 살리되 약점을 집중보완 해서 점점 완벽한 바둑기사를 지향해갑니다.”

독자 중에는 천재들의 바둑 공부법을 참고하여 실력을 키우고 싶은 이들이 있을 터다. 정 사범은 그들에게 바둑의 기본기인 계산력, 수읽기, 능률이라는 세 가지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둑은 상대보다 많은 집을 지으면 이기는 게임입니다. 바둑판은 총 361칸인데 나와 상대가 번갈아 가며 수를 두니까 칸 모두를 내 집으로 삼을 순 없습니다. 서로 계산을 하면서 내 집을 짓고, 상대 집을 파괴하려 드니까요. 그렇기에 항상 현재 내가 가진 집, 상대가 가진 집을 즉석에서 계산하는 계산력이 필요합니다. 또 집은 지금 나와 상대가 가진 집 외에 전장에 남아있는 숨은 집이 있죠. 이 숨은 집을 계산해서 어떻게 차지할지 시나리오를 짜야 합니다. 물론 상대방의 시나리오는 어떤지 수읽기도 잘 해야 하고요. 나머지는 내가 고안한 작전대로 최선의 수를 두는 것입니다. 이를 능률이라고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책을 읽는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에 대해 '열정과 몰입'을 강조했다.“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미치치 않으면 도달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한평생을 바둑 천재를 육성하는데 미쳐 살았습니다. 큰 부를 얻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세상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지만 상관없었습니다. 내가 가르친 제자가 정상에 올라 포효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꿈을 다 이룬 기분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제각기 열중하는 분야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한 번 제대로 미쳐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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